직장인이 맞는 사람이 있고, 사업이 맞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DNA가 다른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내 DNA가 어느 쪽인지를 몰랐다.
금융지주에서의 깨달음
금융지주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의욕이 있었다.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배울 수 있는 환경이었다. 예대마진의 구조, 고객 관계가 장기 수익으로 연결되는 방식. 실제로 배운 것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고위급 간부회의에서 부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 '10년 뒤에 행원이 지금의 3분의 1로 줄어들 것이다. 디지털은행 만들고 지점 통폐합으로 행원수가 확 줄어 들거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내 주변의 행원 출신의 선배들의 커리어가 회사의 전략에 달려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본인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 잘함이 회사의 방향과 맞지 않으면 결국 숫자로 조정되는 구조. 와.. 이게 직장 생활이구나.
BBQ에서도 같은 것을 봤다
BBQ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마케팅팀에서 운좋게 광고담당자까지 하게 되어 IMC를 기획하고, 매체를 사고, 성과를 측정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같은 구조적 문제가 보였다. 신제품 출시 캠페인이 잘 되면 마케팅 덕분이고, 안 되면 SV(영업관리조직)팀 탓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월요일 아침 회의에서 실제 매출보다 보고서의 스토리라인이 더 중요한 분위기. 실적과 분석보다는 책임소재를 선명하게 하려는 보고서.
진짜가 아닌 것을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진지충 DNA
돌아보면, 직장인이 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내 진지충 DNA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잘 되면 감사한 일이고, 안 되면 내 탓인 환경. 조직정치로 인해 누군가를 미워하고 견제해야 하는 에너지 낭비가 싫다. 스타트업 씬은 이런게 참 깔끔해서 좋다.
